어재연 장군 수자기 & 신미양요
어재연 장군 수자기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는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치열하고 비극적인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강화도 광성보에서 미군과 맞서 싸운 어재연 장군은 끝내 순절하며 나라의 자존심을 지켰고, 그 과정에서 장군의 지휘 깃발인 ‘수자기(帥字旗)’는 전리품으로 미국에 빼앗겼습니다. 수자기는 단순한 전쟁의 깃발이 아니라, 조선의 독립정신과 저항의 상징이자 오늘날까지 환수 논란이 이어지는 중요한 문화재입니다. 본 글에서는 어재연 장군의 생애와 공적, 신미양요의 전개 과정, 수자기의 역사적 의미와 반환 논란까지 심도 있게 다뤄보겠습니다. 어재연 장군의 생애와 관직 생활 어재연(1823~1871)은 본관 함종, 자 성우로 태어났습니다. 체격이 장대하고 무예에 뛰어나 어려서부터 장사로 불렸으며, 1841년 무과에 급제하면서 무관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광양현감, 평양중군, 풍천부사, 대구영장, 장단부사 등 여러 관직을 거치며 민생을 안정시키고 폐단을 바로잡는 선정을 펼쳤습니다. 특히 풍천부사 재직 시에는 농토가 염분으로 황폐화된 상황에서 새로 양전을 실시해 세 부담을 줄였고, 대구영장으로 있을 때는 도둑을 엄하게 단속해 백성들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고종은 그를 어진 관리로 꼽아 표리(임금이 내리는 옷감)를 하사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그는 무장뿐 아니라 행정 능력까지 겸비한 인물이었으며, 훗날 국난이 닥쳤을 때 앞장서 싸울 준비가 된 인물이었습니다. 신미양요와 광성보 전투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미군이 조선에 보복을 가하고자 했고, 1871년 제독 로저스가 이끄는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했습니다. 조선군의 화력이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어재연 장군은 광성보 방어를 총지휘했습니다. 초지진과 덕진진이 함락되자, 미군의 화력은 곧바로 광성보로 집중되었습니다. 대포 143문을 배치했지만 성능이 미군의 포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광성보는 함포와 곡사포에 초토화되었고, 결국 백병전까지 벌어졌습니다. 이 와중에도 어재연 장군은 군사들에...